일본인과 여우, 이나리 신앙
시바무라 진(柴村仁)의『우리 집의 여우신령님(我が家のお稲荷さま。,2004~)』은 여우 요괴가 등장하는 라이트 노벨이다. 라이트 노벨은 현시대의 트랜드를 적절히 파악하여 이를 상업적인 작품으로 만드는 대중 문학 매체다. 본 작품은 제10회 전격 게임 소설대상의 ‘금상’을 수상하여 2004년 처음 출간되었으며, 2007년부터 출판만화로 발매되었고, 2008년에는 24부작 TV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는 등 원소스멀티유즈(OSMU)작업도 활발하였다. 한국에는 2007년에 학산문화사를 통해 정식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작품의 제목인『我が家のお稲荷様。』에서 먼저 ‘오이나리사마(お稲荷さま)’ 대하여 살펴보겠다. ‘이나리’를 코지엔(広辞苑) 제6판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이나리[稲荷]
(이네나리(稲生)가 변한말)
① 오곡을 지배하는 우카노미타마(倉稲魂)를 섬기는 자.
② 미케츠가미(御食津神)를 미케츠가미(三狐神)와 부합하여, 이나리신의 사자(使者)라는 속설에 의해서)여우의 속칭
③ (여우가 좋아하는 것이라는 것에서)⇨ 유부(油腐) ②의 이칭. 또 유부초밥의 줄임말.
④ (도둑들이 쓰는 은어) 두부. 또한 팥을 섞어 지은 밥.
⑤ (예인들 사이의 말) 유랑 예인들이 마을을 돌 때 세우는 가늘고 긴 깃발.
⑥ 이나리마치의 줄임말.
‘お稲荷さま’를 한국어 정식 번역본에는 ‘여우신령님’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稲荷’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으나 신으로 받들어지는 여우 요괴가 그려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나리’는 ‘여우’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위 코지엔 사전에서 여우와 관련이 있는 항목은 ①, ②, ③이다.
먼저 ①을 살펴보겠다. 일본 교토시 남쪽의 후키쿠사(深草) 지역에는 ‘이나리(稲荷)’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있다. 그 산기슭에 큰 사당이 있는데 이를 ‘후시미 이나리대사(伏見稲荷大社)’라 한다. 이 신사는 ‘우카노미타마노카미’라는 신을 주신으로 섬기고 있다. 코지엔에도 나와 있듯이 우카노미타마노카미는 곡물을 지배하는 농업신(農業神)이다.
‘후시미 이나리대사’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서기 3-4세기를 전후하여 고대 신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큰 배를 타고 동해를 건너서 일본땅으로 왔다. 그들은 하타씨(秦氏)가 중심이 되어 고대 야마시로국(지금의 교토)일대를 개간하여 농토를 비옥하게 만들었다. 하타씨 문중에는 7세기에 살았던 하타노 이로코(秦伊呂具)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후카쿠사 터전의 재력이 가장 큰 부호였다고 한다. ‘야마시로국 풍토기(山城国風土記)』’에 보면 다음과 같은 고사가 나온다.
하타노 이로코는 풍년을 기뻐하며 어느 날 떡을 빚어 하늘에 던지며 활을 쏘았다. 표적으로 삼았던 화살에 맞은 떡은 순식간에 하얀 백조로 변신하여 영마루로 날아 올라갔다. 백조가 봉우리 쪽으로 날아가 앉은 그 자리에서는 신묘하게도 대뜸 백조가 벼(稲) 이삭으로 변하여 땅에서 솟구쳐 나오는게 아닌가. 이에 감동한 하타노 이로코는 그 자리에 엎디어 큰 절을 올렸다. 그는 그 터전을 신라 농신(農神)의 신령한 성지(聖地)로 삼고 그 곳에다 처음으로 신라 농신을 받드는 사당을 세워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그 사당이 지금의 교토 후카쿠사의 후시미 이나리대사이다.
이와 같이 이나리는 완전한 ‘신’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여우와 관련된 부분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②와 같이 ‘이나리’는 여우의 속칭으로도 쓰이고 있다. 1697년에 간행된 『本草食鑑』을 보면, 요술을 잘 부리는 여우에게는 신(神)이 계급을 주었고, 마을마다 집집마다 원래부터 여우는 있으나 늘 모습을 숨기고 있어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마을마다 비어 있는 땅에는 필히 소사(小祠)를 세워 이를 ‘이나리’라 칭하며 여우신에게 빌면 복을 주고 화를 물리친다고 하였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우가 이나리신의 사자(神使)로서의 여우와 같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여우신을 이나리라고 칭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신의 사자는 보통은 神の使い(가미노쯔가이,かみのつかい)로 읽고, 신이나 신사에 소속되어 신의 심부름을 하는 존재를 가리킨다. 가미노쯔가이로 전해지는 동물로는 히에(日吉)의 원숭이, 하찌만(八幡)의 비둘기, 카스가(春日)의 사슴, 쿠마노(熊野)의 까마귀, 다이코쿠텐(大黒天
여우는 일본인에게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친숙한 동물로써 함께 해왔다. 나라(奈良)・헤이안(平安)시대에 조정에서 편집한 역사서인 릿고쿠시(六国史)를 살펴보면 상대시대에 나타나는 여우의 모습을 알 수 있는데, 약 8세기 중엽(740년경)까지는 여우가 신성한 동물처럼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쇼쿠니혼기(続日本記)』에 와도우(和銅)5년(712) 7월 15일조에는 ‘이가노쿠니(伊賀国)에서 검은 여우(黑虎)를 헌상’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검은 색의 여우는 상서(上瑞)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 레이기(霊気)원년(715) 정월 초하루 조를 보면, ‘동쪽하늘에 경사스러운 구름이 보였고, 토우토미노쿠니(遠紅国)에서 흰 여우를 헌상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흰 여우도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740년경 이후의 기록들을 보면 ‘그냥 여우가 앉아 있었다.’정도로 특별히 상서롭게 여겨지고 있지 않는다. 심지어 ‘여우를 죽였다’거나 ‘내전에 들어왔던 여우를 개가 쫓아내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를 보면 여우에 대한 생각이 상서로운 동물에서 보통 동물로 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는 740년 이전까지는 흰 여우나 검은 여우같이 색상을 통해 상서로움을 표시하였으나 이후에 단지 ‘여우’나 ‘들여우(野狐)’와 같이 표기함으로써 둘 사이를 별개의 존재로 보았다고도 해석할 수도 있다.
헤이안 초기의 불교설화집인 『니혼료이키(日本霊異記)』여우와 관련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다.
미노노쿠니(美濃国) 오노(大野)군에 어떤 남자가 아름다운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아이를 하나 얻는다. 그와 동시에 그 집에서 키우던 개도 새끼를 낳는다. 봄이 되고 강아지가 그 여인만 보면 자꾸 짖자, 여인은 남편에게 그 강아지를 없애자고 하지만 남편은 그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강아지가 그 여인을 보고 짖어 여인은 그만 놀라 자신의 실체가 여우라는 것을 드러내고 만다. 결국 여인은 집을 떠나게 되고 떠나가는 아름다운 부인의 뒷모습을 보고 남자는 비록 당신이 여우라고는 하나 나와 부부의 연을 맺고 아이까지 낳았는데 내가 어찌 부인을 잊을 수 있겠소 「いつもやって来て寝よ」라 하며 언제나 내 옆에 와서 자고 가라고 한다.
여우를 뜻하는 일본어 단어인 ‘기쓰네(きつね)’는 ‘와서 자라’는 뜻의 ‘来て寝ろ’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여우는 인간으로 둔갑할 수 있으며 심지어 사람과 혼인해 아이까지 나을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교겐 「쓰리기쓰네(釣狐)」에서는 남자로 둔갑하는 모습도 나온다.
중국의『현중기(玄中記)』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여우는 50년을 묵으면 여인으로 변할 수 있다. 100년을 묵으면 미녀가 될 수 있으며 신통한 무당도 될 수 있다. 혹은 남자가 되어서 여인과 관계를 맺기도 한다. 1,000리 밖의 일도 훤히 알 수 있으며 사람을 잘 홀려서 정신을 못 차려 이성을 잃게 한다. 1,000년을 묵으면 하늘과 통하는 천호(天狐)가 된다.
이와 같이 여우가 인간으로 둔갑할 수 있는 존재로 본 것은 일본만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여우는 『니혼료이키』에 나오는 설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종종 인간을 속이는 존재로 여겨진다. 또 어두운 밤 산중에 나타나는 괴상한 불빛이 나타나곤 했는데, 이를 여우 입에서 나오는 불이라 여겨 ‘기쓰네노 조친(狐の提灯 : 여우 초롱)이라 부르기도 한다. 여우로 인해 병을 얻거나, 여우가 사람에게 빙의하여(이를 ‘기쓰네쓰키(狐憑き)’라고 한다) 이상한 일을 하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고대나 중세 도시의 거리를 행진하는 ‘백귀야행’을 대신해서 등장한 에도의 밤거리를 야행하는 행렬도 여우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여우의 결혼식’ 행렬이다. 이 외에도 여우한테 속아서 말똥을 밥으로, 소뼈를 반찬으로 착각하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같이 여우는 인간에게 환상이나 괴이를 보이게 하며 인간에게 빙의하거나 속이는 일종의 요괴와 같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반대로 여우와 관련된 보은담(報恩談)도 전하고 있다.『콘쟈쿠모노가타리슈(今昔物語集)』제27권에는 어떤 젊은 무사가 여우의 구슬을 장난삼아 빼앗았다가 다시 돌려주게 되었고, 여우는 그 일에 대한 보답으로 무사를 도와주는 일화가 나온다. 작자는 마지막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일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짐승은 이처럼 은혜를 알고 거짓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여 어떤 기회가 있어 도와줄 수 있을 적에는 이런 짐승은 반드시 도와줄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려가 있고 인과의 도리도 알 수 있으련마는 짐승보다도 오히려 은혜를 모르며 불성실하다고 전해진다.
③은 여우가 유부초밥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보통 유부초밥을 이나리즈시(稲荷寿司) 혹은 기쓰네즈시(狐寿司)라고 부름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19세기, 에도시대 풍습을 담은『모리사다만코(守貞謾稿)』에 한 구절을 들 수 있다.
텐포(天保, 1830年~1844年)말년, 에도에서는 유부(油揚げ)두부의 한쪽끝 부터, 목용 박고지를 썰어 섞은 밥을 집어넣고, 스시로 만들어 팔았다. (중략) 이름하여 ‘이나리즈시(稲荷鮨)’, 혹은 ‘시노다즈시(篠田鮨)’라고 한다. 이는 여우에서 따온 이름으로 ‘야칸(野干: 여우의 다른 이름)’은 유부를 좋아하는 동물이라는 연유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유부초밥과 여우는 직접적으로 큰 관계는 없고, 단순히 여우가 유부를 좋아한다는 속설에서 생긴 명칭으로 보인다.
이상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나리’는 원래는 곡물을 담당하는 신이지만 발음의 유사성 때문에 여우가 그의 사자로 여겨졌고, 이후 ‘여우’의 다른 말로 쓰였다는 점, 그리고 여우는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으며, 병에 걸리거나 사람을 속이는 등 해를 끼치기도 하지만, 은혜를 갚기도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여우는 유부를 좋아하여 유부초밥을 ‘이나리즈시’나 ‘키쓰네즈시’로 부른다는 점도 있다.
전통과 현대 대중문화의 요소가 결합된 여우 요괴
제목에 ‘お稲荷さま’가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 작품내에서는 이 단어가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대신 ‘쿠우겐(空幻)’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우 요괴가 등장한다. 이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일본에서 ‘이나리신’이 여우와 혼동되어 쓰이는 문화적 배경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 작품 안에는 기본적으로 일본인이 여우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반적 인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처음 미즈치 가의 큰할머님이 타카가미 형제를 쿠우겐에게 데려갈 때에 과거 쿠우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 있다.
“몇 백 년도 옛날 일이니라-. 아직은 미즈치 가의 영력도 강대했을 무렵, 수기를 부를 목적으로 한 마리의 커다란 묵은 여우가 미즈치의 수호신으로 모셔졌다. 이름이 쿠우겐이라고 하는, 영력이 강하고 온갖 주술을 자유자재로 쓰는 몹시 영리한 여우였지. 하지만 동시에 소동을 아주 좋아하는 장난꾸러기 여우이기도 했어. 녀석의 변덕으로 당시에는 대단한 피해가 나왔다. 여우불이 대량으로 발생해서 마을 하나가 불바다가 되고, 대낮부터 온갖 잡귀가 가도를 누비며 다니고.”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 가축이 사람 말을 지껄이고, 멸구가 이상발생하고, 쿠우겐이 부른 거대한 오징어가 바다를 석권해 어업에 지장이 생기는 등등.”
“확실히 악질이었지. 하지만 행실이 꼭 나쁘지 만은 않았어. 갖은 장난을 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돌림병을 다스리거나, 가뭄 중에 비를 내리게 하거나 광부에게 금맥을 가르쳐 주거나, 가난한 농촌에 사금의 비를 내려 주기도 했으니까. 어느 때는 가난한 고아 처녀에게 시집갈 혼수를 번듯하게 차려준 적도 있었고… 말하자면 기분파였지.”
“뭐, 그렇게 해서 쿠우겐 여우는 백성들에게 감사받는 일도 적지 않았어. 하지만 거듭된 경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반성도 하지 않으며,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지나친 소행을 반복하는 쿠우겐을 보다 못한 당시 미즈치의 사제는 중앙의 술사와 협력해 일곱 낮 일곱 밤이 걸려 겨우 쿠우겐을 봉인했다.”
여기서 쿠우겐은 본래 요괴였지만 필요에 의해 수호신으로 모셔진 것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여전히 쿠우겐은 주술을 자유자재로 쓰며 장난꾸러기라 마을에 큰 소동을 일으키는 등 요괴에 가까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백귀야행’에 대한 묘사도 그 중 하나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을 돕기도 한다. 가뭄 중에 비를 내리게 했다는 것은 농업신인 이나리의 모습이 일부 묘사된 것처럼 보인다. 이같은 이중성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일본인이 가지고 있는 여우에 대한 인식이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흥분을 하거나 경계심을 발할 때 ‘입에서 파란 불빛을 흘리기 시작한다’고 묘사되어있다. 이것은 ‘기쓰네노 조친(狐の提灯)’을 묘사한 것이다. 또 ‘혼령 보내기’를 할 때 힘을 얻기 위해 유부초밥을 먹는 장면도 있다. 쿠우겐은 “유부초밥을 먹으면-뭐라고 그러냐, 천하를 얻는 것 같은 기분이 되지 않느냐?”하며 유부초밥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현한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로 자유자재로 둔갑하는데『현중기』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천년이상을 묵은 ‘천호’의 모습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귀만 남겨두는 이유에 대해서 내용상으로 특별한 언급은 없다. 쿠우겐이 귀를 내놓는 것은 소설 외부에서 찾아야 한다.『우리 집의 여우신령님』은 ‘라이트 노벨’이라는 출판 형식을 따르고 있다. 라이트 노벨은 외형상 만화나 애니메이션 풍의 그림이 표지와 삽화로 채워져 있는 형태의 소설을 말하는 것으로써 애니메이션 오타쿠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유행하기 시작한 ‘모에(萌え)’라는 미소녀 코드를 상당수의 라이트 노벨이 사용하고 있다. ‘모에’는 의미를 정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보통 미형의 여성 애니메이션이나 만화・게임 캐릭터에게 느끼는 호감과 귀여움을 표기하는 감탄사로써 사용된다. 독자에게 ‘모에’를 불러일으키는 요소는 캐릭터의 외형이나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직업, 말투나 성격, 작품의 분위기, 이야기의 전개방식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모에 요소는 이런 여러 ‘속성’들을 조합하여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아즈마 히로키(東浩紀)는 이런 속성들을 조합해 캐릭터를 만드는 것을 두고 ‘데이터베이스’에서 파생되는 2층 구조 문화로 파악 하였다. 기존의 이야기를 중시하는 작품들은 큰 이야기를 심층에 두고, 표층에는 작은 이야기를 두어, 독자들은 작품(작은 이야기) 속에서 주제를 찾아 감추어진 큰 이야기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방식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모에’와 관련된 캐릭터 중심의 작품들은 이야기 요소가 약화되고 대신 ‘데이터베이스’에서 여러 속성들을 조합한 캐릭터를 내세우는 방식으로 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우리 집의 여우신령님』을 이끌어가는 주된 요소 중 하나가 ‘음양도’이다. 음양도는 우주만물은 음·양의 조화에 의하여 생성(生成)하는 것이며 그 변화는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5원소(原素)로 추진된다고 하는 일종의 자연철학 및 자연과학을 말한다. 미즈치가는 대대로 수기(水気)를 담당해온 집안이었고, 쿠우겐을 수호신으로 모신 것도 수기를 빌리기 위함이었다.『우리 집의 여우신령님』에 등장하는 요괴들은 모두 오행 중 하나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쿠우겐이 직접 음양도를 이용하여 요괴를 물리치는 등 퇴마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우가 퇴마행위를 한다는 것은 기존의 이나리 신앙이나 여우 설화에서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일본은 영화『음양사(陰陽師: 다기타 요지로 감독)』와 같이 대중 문화 콘텐츠에서 마물이나 요괴를 물리치는 퇴마물이 하나의 장르로서 자리잡고 있다. 쿠우겐이 타카가미가의 수호신으로 사실상 퇴마사 역할을 하는 것은 이러한 대중 문화의 영향력 안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요괴와 인간과의 새로운 관계
고마쓰 가즈히코(小松和彦)는 “‘신’과 ‘요괴’의 구별은 쉽지 않다.”면서도 ‘신’을 “사람들이 모시며 섬기는 초월적 존재”, ‘요괴’를 “제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 초월적 존재”라 구별한다. 더 나아가 “초월적 존재를 ‘신’으로서 제사를 받았던 존재와 제사를 받아본 적이 없는 존재로 구별하고, 전자는 사람에게 재액을 초래해도 요괴는 아니고, 후자가 사람들에게 재액을 초래하고 있을 경우에는 ‘요괴’로 인식한다고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영적인 존재가 요괴 혹은 신이 되는 것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여우는 이나리의 사신이나 이나리 자신으로 신성시되기도 하였으나, 사람으로 둔갑하여 홀리는 ‘요괴’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우리 집의 여우신령님』이 그러한 요소를 반영하고 있음도 알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 인용했던 큰할머님의 쿠우겐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수백년전의 쿠우겐의 모습이다. 타카가미의 수호신이 된 이후 쿠우겐은 여전히 장난기어린 모습을 하고있지만 장난이 심하지는 않으며 자기 목숨을 걸고 미야코와 그녀의 아들들을 위해 몸을 던지는 모습도 보여 준다. 이것은 큰할머님이 말했던 쿠우겐의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큰할머님은 전통을 상징한다. 고리타분한 성격에 인간과 요괴, 혹은 신과는 별개의 경계선 너머 별개의 공간에서 각자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큰할머님은 앞에서 인용한 구절처럼, 자신의 타카가미 형제에게 쿠우겐의 과거를 말할 때는 일률적으로 ‘쿠우겐’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사당에 들어가 쿠우겐과 직접 만나 대화를 할 때에는 ‘천호님(天狐様)’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다. 이는 전통적 의미에서 요괴(인간에게 재액을 초래하는 존재)와 신(인간이 모시는 존재)의 양면성을 동시에 지닌 쿠우겐의 특징을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다. 아래에 쿠우겐과 미즈치가 나누는 대화다.
“어쨌든 나는 미즈치의 인간을 도울 생각 따위 조금도 없느니라. 하하, 얼른 요괴한테 먹혀 버리라지.”(중략)
인간을 바보로 여기는 여우의 말투에, 그러나 큰할머님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알고서도 천호 님은 거절하실까요.”
“…호오….” 상대의 예상 밖의 반응에, 여우의 얼굴에 경계심이 배어 나왔다. “누구냐.”
큰할머님은 목소리의 톤을 하나 낮췄다. “미야코의 아들입니다.”
호박 보석 같은 눈이 부릅 뜨였다. 여우는 명백히 놀라고 있었다.
큰할머님은 쿠우겐을 ‘신’으로 섬기고 있지만, 사실 관계를 따지면 그 신을 사당에 봉인해 놓고 있는 입장, 즉 쿠우겐보다 우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위협을 받는 대상이 ‘미야코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들어 쿠우겐과 설전을 벌이고 있다.
“좋다, 주녀(柱女). 조금 아니꼽기는 하지만 네 손바닥 안에서 놀아 주마-힘을 빌려주마. 하지만 착각하지는 마라. 나는 미즈치 일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야코의 아들을 위해 움직이는 거다.”
큰할머님도 히죽 웃으며 모래 바닥에 주먹을 대고 머리를 깊이 숙였다.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큰할머님은 겉으로는 쿠우겐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협박을 하는 듯한 뉘앙스를 내비치고 있다. 쿠우겐은 다른 사람이라면 어찌되든 상관없지만 미야코의 아들이 위협을 당한다는 사실에는 반응을 한다. 위 두 인용문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름이 쿠우겐이야?”
눈앞에 앉은 토오루가 지껄인 것이 무척이나 신선하고 또 놀라웠던 것처럼, 여우는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크게 젖혔다. “…그렇다. 나는 쿠우겐이다.”
토오루는 헤헤 웃었다. “그럼, 쿠우라고 부를게. 별명으로.”
…….(중략)
이 녀석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하며 자못 질렸을 거라 생각했으나, 여우는 뜻밖에도 눈을 가늘게 뜨고 온화하게 크크크 하고 웃고 있었다. “미야코의 아들이라…. 과연…역시나.”
토오루는 쿠우겐을 ‘쿠우(クー)’라고 부른다. 이후 소설지문에는 쿠우겐을 계속하여 ‘쿠우’라 표기하고 있다. 이것은 주녀 큰할머님이 ‘천호님’ 혹은 ‘쿠우겐’이라 불렀던 것과 사뭇 대조된다. 그리고 이 호칭을 듣고 쿠우가 온화하게 웃은 것은 과거에 미야코도 쿠우겐을 ‘쿠우’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쿠우겐을 ‘천호 님’ 이외의 이름으로 부른 사제는 미야코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쿠우겐에게 있어서 사제와-아니, 인간과 대등하게 어울린 것 또한, 이것이 처음이었다."
『우리 집의 여우신령님』은 ‘신’이면서 동시에 ‘요괴’인 여우가 등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제3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타카가미 형제는 쿠우겐을 격리된 세계의 다른 대상으로 보지 않고, 대등한 친구로서 대우한다. 친구이기 때문에 쿠우겐을 집안의 수호신으로 받아들였지만 별도로 모시거나 하지는 않는다. 쿠우겐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학교를 가거나 서점에 들리거나 슈퍼마켓으로 장을 보러 가기도 한다. 이는 영적인 존재와 인간이라는 존재의 ‘경계’가 허물어짐을 뜻한다. ‘요괴’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타카가미 형제였지만 이제는 요괴와 함께 산다.
이것은 이 작품이 주는 감동과 연결되어 있다. 쿠우겐은 미야코와의 친분을 통해서 그동안 관심 밖에 있었던 인간의 ‘짧은 인생’에 눈을 뜬다. 미즈치의 사제는 대대로 단명하였고, 쿠우겐은 그 동안 많은 사제가 죽는 모습을 수없이 보았다. 그러나 생애 처음 ‘친구’로 지냈던 미야코의 죽음은 그에게 상당히 다르게 다가온 것 같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 짧은 인생의 덧없음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친한 ‘친구’였다는 이유만으로 쿠우겐은 자신의 영력을 바쳐 ‘혼령 보내기’를 시도한다. ‘혼령 보내기’는 토지와 토지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주술이다. 최종적으로 어머니를 실제로 보지 못하고 ‘경계’너머로 보내야만 했던 동생 토오루는 경계 너머에 있는 어머니를 보게 된다. 이 때 쿠우겐은 두 세계 사이에 징검다리 역할을 자진하여 한 것이다. 천편일률적인 신과 요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대등한 우정을 나눔으로써 요괴가 인간이 함께 사는 새로운 세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집의 여우신령님』에서 제시되는 여우 요괴상은 전통적인 요괴상 위에 현대 대중들이 인기를 끌만한 상업적 요소가 추가된 형태를 하고 있다. 모에 요소는 라이트 노벨의 법칙이 반영되어 있으며, 퇴마사적 성격은 오락적인 대중문화적인 요소다. 요괴를 친구처럼 묘사한 부분에서 현대인들은 요괴가 더 이상 실재한다고 믿지 않으며, 하나의 엔터테이먼트로써 소비하는 친근한 대상이라는 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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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http://www.wikipedia.org)
네이버 백과사전(http://100.naver.com)
도서 정보
우리 집의 여우신령님(我が家のお稲荷さま。)
시바무리 진 지음, 호덴 에이조 그림, 김수현 옮김
학산문화사
2007
덧글
근데 두 군데 한자 입력을 실수하신 것 같네요; '靈氣'는 '靈龜'고, '遠紅'는 '遠江'입니다.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현대인들은 요괴가 더 이상 실재한다고 믿지 않으며, 하나의 엔터테이먼트로써 소비하는 친근한 대상이라는 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는 부분이야.
나는 이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악역의 성격을 보면서 '친구 & 적'의 구도를 좀 더 명확하게 나누는 고전적인 형태를 충실히 답습했다고 생각했거든. 확실히 친근한 대상으로서 등장하는 요괴도 존재하지만, 명확한 악의를 드러내는 위험 또한 다른 게 아니라 전통적인 이능적 존재(요괴, 신, 오니 등)를 다른 방향으로 해석한 캐릭터들이잖아. 그리고 주역 뿐만 아니라 그런 악역 캐릭터들의 사정 또한 굉장히 인간적으로 비춰주고 있는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쿠우겐을 신이나 요괴가 아닌 제3의 길로 받아들이는 모습은 엔터테인먼트적인 친숙한 소비라기보다는 여성작가 특유의 감성적인 면모가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아. 요괴 자체의 기호적 의미를 소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흐름 내에서 발생하는 구도를 작가의 감성으로 소화하는 과정에서 그런 특성이 생겨난 것 같다고 생각해.
결과적으로는 인간과 요괴의 관계를 그려내는 현대적인 형태를 보여주긴 했지만, 작가의 특징을 감안했을 때 그것이 꼭 요괴의 위치에 대한 현실적인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고만은 말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
사실 이 글의 단점이라면 너무 얌전하다는 것(논문 형식으로 글을 쓰는 건 여러가지 제약이 많음, 따라서 몸을 좀 사린 감도 있음)과, 일반화하기에 엔터테이먼트화된 요괴의 다른 예시를 좀 더 들었어야 하는 것, 이렇게 두가지를 들고 싶네.
물론 그러한 현상 해석 자체가 틀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고, 댓글 아래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다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완벽한 설득력을 가질 수 없는 작례가 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특별히 댓글을 달 말이 없다고 이야기 한 것도 틀린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고. 결론은 다른 예시가 좀 더 필요하다는 것..
<공각기동대>외에도 애니 쪽으로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논문 소재로 잘 채택되곤합니다.
흔히 욕망을 정당화함으로써 부추기는 내용으로 오용되는 다니엘서가 실제로는 유대민족으로서의 종교적 정체성을 상실한 위기에 처한 민중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이야기인 것도 그 때문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