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들린다 - 츤데레는 환상일 뿐이야!!

<바다가 들린다>는 애니메이션으로 더 잘 알려진 작품이다. 중3때, 친구가 가지고 있었던 비디오를 빌려서 봤는데, 지금까지 열 번을 넘게 돌려봤을 정도로 내 생애 최고의 애니메이션으로 남아있다. 애니메이션판이 가진 매력은 다음에 쓰기로 하고, 이번엔 소설에 관해서만 다루겠다. 
 

<바다가 들린다>는 청춘 소설 작가 히무로 사에코가 1990년 1월부터 1991년 12월까지 일본의 애니메이션 전문지 ‘아니메쥬’에 연재했던 소설이다. 이후 모지츠키 토모미가 감독한 TV스페셜 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17%가 조금 넘는 높은 시청율을 기록했고, 나중에 2권이 출판된다. 우리나라에는 2003년 집사채에서 정식 발매했지만 지금은 절판되어 서점에서 이 책을 구할 수는 없다.  

일본판과 한국판 비교


(개인적인 이야기를 보태자면, <바다가 들린다>를 그렇게나 좋아했건만, 국내에 원작이 정발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절판중이어서 헌책방을 뒤지지 않는 이상 구할 수 없었다. 결국 원서를 찾아내서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모두 읽었다. 동네 도서관에 정발본이 있긴 했었으나, 원서를 모두 읽고 참조하기 위해 잠깐 빌렸다. 내가 본 원서는 1999년에 재발매된 버전으로 표지가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한국판에도 있는 일러스트 몇 장이 빠져 있었다. 대신 동경도립대학조교수이자 사회학박사라는 분의 작품 해설은 원서에만 수록되어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2권은 한글판으로 읽을 예정이다.)
 

<바다가 들린다>의 애니메이션은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제작했지만 외부 감독을 고용하고, 젊은 스텝을 적극 기용하여 미야자키 하야오나 타카하다 이사오 등의 대감독의 입김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가장 지브리답지 않는 지브리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여주인공인 무토 리카코는 지브리 애니 유일의 츤데레 캐릭터라고 생각해왔다. 미야자키가 창조한 여캐릭터가 영웅적이며 헌신적이며 때로는 어머니 같은 이상적인 여성 캐릭터라면, 리카코는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지만 싸가지 없는 캐릭터라는 점이 특별하다.
 

그러나 소설을 읽고 나선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를 츤데레라고 단정짓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소설판은 중후반부까지는 애니랑 거의 똑같이 흘러가지만, 애니에서 거의 다루지 않는 주인공 타쿠의 대학생활이야기를 꽤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애니메이션에서 나오지 않는 선배 캐릭터도 나온다. 무엇보다 애니메이션판에서 고등학교 졸업후 타쿠와 리카코가 한번도 마주치지 않다가, 맨 마지막 엔딩에서야 극적인 재회를 하고 여운을 남기는 열린 결말로 끝냈던 것과는 달리 원작에서는 대학가서 만날 뿐 아니라 타쿠가 바라마지 않던 코오치 성을 리카코와 나란히 올려다보는 일이 현실화된다. 
 

여기서 생기는 문제점. 츤데레는 말그대로 츤츤거리기만 해서는 성립할 수 없다. 설마 대사 99%가 남주인공에 대한 온갖 험담으로 가득차있다 하더라도, 1%의 데레가 있으면 츤데레 캐릭터는 성립한다. 1%의 데레덕분에 99%의 츤이 다 용서가 될 수도 있다는 거다. 스즈미야 하루히가 아주 가끔씩 보이는 귀여운 면이나,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 1권 마지막에 나오는 키리노의 ‘고마워, 오빠’라는 한마디 대사가 바로 그런 것이다. 
 

애니메이션 판 <바다가 들린다>는 명백히 그런 부분이 있었다. 너무나도 유명한 대사 ‘도쿄에 가면 꼭 만나고픈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은 말이지 욕실에서 자는 사람(타쿠를 뜻함)이야’가 바로 그것이다. 싸대기를 때리면서 ‘바보! 너따윈 최악이야!’를 퍼붓던 소녀가 1년여가 지나 바로 그사람을 지금 가장 만나고 싶다는 말을 친구에게 건네는 장면은 남성들에게 온갖 드라마틱한 상상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두 주인공이 재회하는 부분에서 이야기를 끝냄으로써 시청자들은 뒷 이야기를 마음껏 상상하게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원작은 그런 부분이 전혀 없다! 사실 어쩌면 이것이 당연할지 모른다. 그 도도하고 이해타산적인 여자가 대학간다고 해서 갑자기 온순해질 리가 없다-_-; 물론 원작과 애니 모두 ‘어릴 때 자신의 세계가 좁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같은 대사지만 화자가 서로 다르긴 했다), 그렇게 성숙했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소설 쪽이 훨씬 설득력 있다. 도쿄에 있는 대학을 갔던 것은 타쿠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다순히 코오치가 싫었던 것 뿐이며, 타쿠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도쿄생활이 외로워서 였다. 

여기서 츤데레 캐릭터를 다시 돌아보자. 츤데레는 사실 환상이다. 가타부타 덧붙일 말도 필요없다. 명백히 환상이다. 남성들이 가지는 판타지다. 좋아하는데 일부러 괴롭히거나 하는 일이 실제로도 어느 정도 있을 수 있지만, 실제 그런일이 있었을 때 해당되는 여성을 보고 귀엽다고 느끼진 않을 것이다. ‘저 소녀가 도도한 척 하지만 실제로는 나만 좋아한다’는 것은 망상의 세계에선 누구나 한번 쯤 해보는 상상이지만, 이것은 여성의 입장이 들어있지 않은 자신의 소유욕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반면 <바다가 들린다> 소설은 얼핏보면 라이트노벨처럼도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라이트노벨은 아니다. 애니메이션 잡지에 연재했기 때문인지 만화 풍의 일러스트가 수록되어 있기는 하다. 또 애니메이션화도 되었고, 일러스트를 담당한 콘도 카츠야가 애니판의 작화감독을 맡아서 미디어믹스도 되었다. 이전엔 원작자의 소설이 만화화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작가 히무로 사에코는 라인트노벨 작가가 아닌 여류 청춘소설 작가로 분류된다. 물론 이당시에는 라이트노벨이라는 단어자체도 대중화되지 않았고, 그런 시장도 형성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작품이 나온다 하더라도 라노베라고 하기에는 소설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코드가 다르다. (노파심에서 미리 말해두지만 라노베가 아무리 정의가 불가능한 소설 형태이지만, 최소한 라노베 꼬리표를 달고 나오는 소설에는 그들만의 코드라는 것이 있다)
 

<바다가 들린다>는 그런 만화쪽 감성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나(뒤에 달려있는 박사님의 해설 참조. 순정만화적 감성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 영화에서도 자주 나오고 있어 일반화되었음) 정형화된 코드, 요즘식으로 하자면 오타쿠식 코드는 전혀 없는 아주 현실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소설이다. 때문에 인물의 성격은 다 그리된 이유가 있고, 충분히 공감할만한 지구상 어딘가에 실제 존재할 것 같은 살아있는 캐릭터로 그려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맺어지는 것처럼 은근슬쩍 나오는데, 이 역시 남자들이 바라는 ‘사실은 좋아했었다’같은 게 아니라, 남성들이 이해하기 힘든 복잡미묘한 여성들의 심리가 반영된 것이었다.
 

애니메이션판은 상당 부분 원작을 따르고 있지만, 몇몇 부분이 삭제되고 창조되어 조금 변했다고 생각한다. 모치즈키 토모미 감독이 이후 <내사랑 마리>같은 오덕 애니도 만들었던 만큼 약간의 코드 변화도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애니의 결론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1시간 10분 정도 길이에서 소설과 또다른 감동을 주었던 애니메이션판의 연출은 정말 훌륭했다. 개인적으로도 데레한 리카코가 더 좋다(어이;). 그러나 캐릭터의 심정과 행동의 설득력은 원작이 낫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좋아하는 캐릭터가 이미지가 조금 바뀌었던 건 아쉽지만, 원작이 그런데 어쩌겠나-_-;;

도서 정보




海がきこえる(바다가 들린다)

히무로 사에코 지음, 콘도 카츠야 그림

德間文庫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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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젠카 | 2009/07/23 16:59 | 독서 나눔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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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JOSH at 2009/07/23 17:29
> 도쿄에 있는 대학을 갔던 것은 타쿠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아 이부분은 약간 의미가 잘못 들어가신게 아닌가 합니다.
원래 리카코는 작품상의 갈등으로 토쿄 쪽 대학 밖에 생각 안하고 있었지요.
애니메이션에서도 타쿠 때문에 도쿄의 대학에 가려한다는 내용은
전혀 없었습니다.
타쿠가 토쿄의 대학에 가려한다는 것도 친구를 통해 나중에 알았을 수는 있지만
고교 재학중에는 전혀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Commented by 젠카 at 2009/07/25 00:25
흠, 저도 이부분은 조금 걸리긴 했습니다.
Commented by CARPEDIEM at 2009/07/23 21:42
애니는 못 보고 원작소설만 두 권 다 원서로 가지고 있네요. 줄거리는 다 까먹고 기억나는 거라곤 2권에서 튀어나오는 주인공의 무지막지한 사투리...

현실적? 입체적? 전형적인 소년소녀물 캐릭터와는 다른 인물묘사가 인상에 남아있습니다. 차분하고 자연스레 공감이 가면서도, 그들이 얽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 답답하고 안타까운.(진도도 무지 안 나가고!!)
요즘 라노베에 익숙한 독자들이라면 읽기가 껄끄럽지 않을까 싶군요.
Commented by 젠카 at 2009/07/25 00:26
소설판 한국 번역본은 전부 경상도 사투리로 처리했더군요. 정식 DVD 더빙판도 기대했는데 표준어로 나와 좀 실망;;
Commented by Skeith at 2009/07/25 18:43
그야말로 학교에서 배운 소설의 정의와 부합하는 작품이 아닐까 싶어요.
라노베라기보단 그냥 청춘 소설 같네요. 실제로 츤츤계열의 여자애가 있다면 무지하게 성질이 뻗치겠죠...?
Commented by 젠카 at 2009/07/26 01:18
현실은 시궁창이라네;
Commented by 꺄하 at 2009/08/26 23:24
바다가 들린다를 검색했다가 '츤데레'라는 용어를 처음 듣고 검색해봤는데, 딱 저군요! ㅎㅎ
Commented by 젠카 at 2009/08/27 17:54
헉; 츤데레시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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