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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2 15:17

일본과 자전거 생활 나눔

일본은 자전거를 참 많이 타는 나라다. 길거리를 걷다 보면 자전거 때문에 길을 비켜줘야 할 경우가 자주 생긴다. 중국에 비하면 적을지 모르나 그래도 많다. 아기를 뒤에 태우고 장을 보러 가는 어머니들도 눈에 띈다. 일본은 자전거도 자동차같이 운송수단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자전거를 사면 반드시 경찰에 등록을 해두어야 한다. 자전거 주차장('주륜장'이라고 한다)은 어딜 가나 필수로 있다. 한국에서는 운동하거나 취미로 타는 게 아니라면 보기 힘든 것과는 정말 다르다. 내가 어릴 적엔 거의 걸어 다닌 일이 없을 정도로 많이 타고 다녔던 것 같은데, 위험하다는 이미지가 많아져서인지 일반 주택가에서조차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일본 사람들이 자전거를 많이 타는 이유는 여러가지 있겠지만, 한국과 비교하면 주거지와 상권이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한국은 아파트 단지가 많고, 단지 안이나 근처에 장을 볼 수 있는 마트라든지, 생활 편의 시설이 즐비해 있다. 하지만 일본은 주택지에 들어서면 조용한 2층짜리 주택들만 끝없이 늘어서 있고, 편의점 약간과 슈퍼마켓, 작은 식당 몇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 주요 상권은 전철역 주변에 집중되어 있다. 전철역에서 얼마나 가까우냐에 따라 집값도 천차만별이다. 일상생활이 역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시내버스도 주택에서 역까지 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운행된다. 한국처럼 서울과 경기도를 왕복하는 광역버스 개념이 없다. 그래서 멀리 나가려면 자가용이 없는 이상 전철역에 꼭 가야 하는 것이다. 나이 드신 분들은 역까지 버스를 이용하고,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은 교통비도 아낄 겸 출퇴근 혹은 등하교할 때 자전거를 타고 간다. 큰 슈퍼나 상점들 역시 전철역에 있으므로 어머니들도 장 볼 때 자전거를 이용하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자전거 타기를 즐겼던 터라 일본의 자전거 문화가 부러웠다. 앞에 바구니가 있는 자전거를 정말 타보고 싶었다. 이건 사실 일본에 대한 동경이 그런 형태로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처음 일본에 갔을 때 자전거를 타고 일본거리를 달려보고 싶다는 꿈 아닌 꿈을 꾸었던 적도 있었다. 이젠 바구니 달린 자전거 타기는 일상이 되었다. 오늘도 전철역으로 내 파란 자전거를 타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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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9 16:43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독서 나눔

가나안 성도는 이 책의 저자이기도 한 양희송 씨와의 인연으로 아주 얇게나마 두 명 정도 만나 본 적 있다. 교회를 아예 안나는 건 아니고,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거나, 괜찮은 교회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실망해서 또 고민 중이거나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 책은 그런 가나안 성도들을 표면으로 끄집어 낸 책이라 할 수 있다. 생각보다 가나안 성도들의 숫자는 많은 것 같았고, 이 책은 그들이 단순히 교회에서 상처받고 실망한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편견을 어느정도 깨뜨려주었다. 

읽는 내내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가 생각났는데, 아니나다를까 마지막엔 김교신과 엮어서 무교회주의가 언급된다. 무교회주의가 곧 가나안 성도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제도교회에 대한 실망감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가나안 성도에 주목해서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가나안 성도라 이름 붙였다고 해서 그들이 다 같은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가나안 성도들로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도 그들이 제시하는 질문을 좀 더 주의깊게 들어봐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목소리가 하나님의 목소리일 수 있다. 전혀 새로운 형태의 교회는 가능할까.

-밑줄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자신이 믿는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보잘것없기 때문에 이를 '하나님에 관한 지식' 혹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활동'으로 메꾸려는 경향을 갖는다. 가나안 신앙은 '다 알지 못해도 괜찮은', '다 말할 수 없어도 무방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익히는 신앙이다.

양희송
포이에마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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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7 16:41

미디어믹스화하는 일본-가도카와와 도완고의 합병은 틀렸다! 독서 나눔

단순히 만화연구자라면 평론가들을 비롯해 여럿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일본에서 오타쿠 비평가(단순히 작품이 아닌 그 문화 전반에 걸친 사상이나 사회환경을 통합한 글을 쓰는 사람)라면 상당히 한정되어 있다. 당장은 아즈마 히로키, 사이토 다마키, 미야다이 신지, 오카다 도시오, 모리카와 가이치로, 오쓰카 에이지 정도가 떠오른다. 이 중, 특히 한국에서 대외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즈마 히로키일 것이다. 그러나 아즈마를 비롯해 이 비평가들 대부분은 서브컬쳐가 전공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업계 내부사람이 아닌 외부에서 경력을 쌓고, 이후에 서브컬쳐에 대한 연구 및 비평을 하면서 이름을 알린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오쓰카 에이지는 다르다. 오쓰카도 민속학이라는 베이스가 있지만, 그의 비평이 민속학에 근거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늘 소개할 <세계>-<취향>론 정도일 것이다. 그는 업계 내부에서 작품을 쓰면서 동시에 비평계에서 활동했던 이례적인 인물이다. 아예 '오타쿠'라는 단어가 처음 지면에 실릴 적에, 그 지면인 잡지의 편집장이었다.

2014년, 도쿄대학대학원 정보학환에서 KADOKAWA DWANGO가 외국의 대학원생들을 모아 놓고 기부강좌를 열였다. 이 때 특임교수로 지명받아 강좌를 했던 인물이 오쓰카 에이지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 공식 강좌는 강좌대로 하고, 청중 학생들 일부를 따로 모아서  KADOKAWA DWANGO의 뒷담을 까는 우라제미(뒤에서 몰래 하는 세미나)를 열어버렸다. 급기야 그 뒷다마를 이번에 책으로 출판하여 본격적으로 앞다마(?)를 깟다(물론 출판사는 가도카와가 아니다).

오쓰카 에이지는 가도카와와 도완고의 합병에 대해 부정적이다. 언론에서는 라이트노벨을 비롯한 각종 콘텐츠를 가진 가도카와와 니코니코동화라는 거대 인프라를 가진 두 회사가 합해졌다고 떠들고 있지만, 오쓰카는 둘 다 인프라만 있으며 콘텐츠가 없는 회사라 일축한다. 

오쓰카는 어떠한 것보다도 가도카와와 도완고의 윤리성을 지적한다. 외국의 일본 미디어믹스 연구 등에서는 일본의 미디어믹스 환경이 일본만의 독특한 그 무엇이라는 주장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쓰카는 언제나 <세계>-<취향>이라는 가부키의 형식을 빌려 미디어믹스를 설명하는데, <세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관, 분위기, 무언의 약속, 바탕이라면 <취향>은 그로 인해 파생되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말한다. 어떠한 커다란 이야기인 <세계> 속에서 다양한 <취향>의 이야기가 재생산되는 구조는 어느 나라에서나 존재해왔었다. <태평기>의 <취향>으로서 존재하는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들이 그렇다. 어떠한 문화권에서 공유되는 공통의 기억을 바탕으로 다수의 창작자가 다양하게 변주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형식은 주로 구전되는 이야기들이 그러한데, 민속학에서는 아주 당연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오히려 한사람의 작자가 이야기를 만들어 그 저작권이 법적으로 보호받는다는 개념 자체가 근대 이후에나 생겨난 것으로 비교적 최신의 것이다. 물론 근대 이후에도 대중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는 여전히 <세계>-<취향> 시스템을 추구하며 계속해서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라이트노벨 적인 그 무엇(그것이 캐릭터 성향이든, 문체든 무엇이든 간에)이 다양한 실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과도 통한다.

1980년대 가도카와 쓰구히코가 시도하기 시작한 미디어믹스는 기존의 미디어믹스(그의 형인 가도카와 하루키의 미디어믹스도 그렇다)와는 다른 방향성을 갖고 있다. 기존의 미디어믹스가 어떤 유명한 작가의 작품(콘텐츠)을 영화 등으로 만들어 재생산하는 형식이라면, 쓰구히코가 처음 눈독을 들인 것은 이야기 자체가 아닌 세계관을 미디어믹스하는 식이었다. 지금은 라이트노벨의 고전처럼 받아들여지는 <로도스도 전기>가 바로 그것인데, 아는 사람은 다 알다시피 이 작품은 원래 <던전앤드래곤>이라는 TRPG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게임을 하는 현장을 그대로 문자화해 '리플레이'라고 이름붙이고 잡지에 연재를 했던 것. 이렇게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진 이야기를 소설화하여 다듬은 것이 우리가 아는 <로도스도 전기>라는 작품이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게임을 할 때마다 다른 작품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 <세계>란 원작이 아닌 세계관 그 자체이며 여기서 파생되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공학적(자동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취향>에 해당한다.
 
가도카와의 이같은 미디어믹스 전략은 점차 세계관 중심에서 캐릭터 중심의 미디어믹스로 전환해 간다. 80년대에는 이야기를 재생산하는 구조가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에 캐릭터 중심으로 바뀐것을 두고 아즈마 히로키는 오쓰카의 논의를 받아 '데이터베이스 소비'라 이름 붙여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현상으로 해석했지만, 정작 오쓰카 에이지는 그것은 지나칙 해석이라 보고 동의하지 않는다. 이야기 중심이 캐릭터 중심으로 바뀐 것은 단순한 마케팅 차원의 유행일 뿐이라는 것이며, 일본은 아직 근대화조차 제대로 끝내지 않았다고 말한다. 즉 가도카와 쓰구히코의 미디어믹스 전략(<취향>에 해당하는 콘텐츠의 공학적 생산)은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도완고와 합병한 것은 이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 본다.

오쓰카의 주장은 이렇다. 일치감치 가도카와는 2차 창작도 미디어믹스의 하나로 생각해왔다. 2차 창작은 물론 원칙적으로 따지면 저작권 위반이 맞지만, 일본의 콘텐츠 업계는 지난 시간 동안 이러한 형태의 창작문화에 관대했었다. 이런 파크리(짝퉁) 문화는 앞서 말해왔듯이 <세계>-<취향>시스템의 하나로 인류 보편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이러한 2차 창작에 대한 제재가 점점 심해지고 있고, 저작권 위반 신고에서 '친고죄'항목이 사라질 것이라 예상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이전에 비해서 저작권 위반 신고가 훨씬 심해질 것이고, 그 결과 2차창작을 자유롭게 해왔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2차창작자들은 스스로 몸을 사리게 된다. 그럴 때 가도카와 같이 콘텐츠의 저작권을 갖고 있는 회사가 "이러이러한 가이드라인을 따라서 2차창작을 하면 불법이 아니랍니다."라는 홍보를 한다. 유저들은 그 가이드라인을 따라서(혹은 어떠한 2차창작 대회라는 형식으로 개최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었지만 아직 참여율이 극도로 적어서 무산되었다) 2차 창작물을 만든다. 대신 그렇게 만들어진 2차 창작을 통해 가도카와가 일정한 수익을 얻겠다는 것.

바로 이것이 오쓰카가 지적하는 반윤리성이다. 인류가 보편적으로 행해왔던 <세계>-<취향>시스템을 상업적으로 이용해서 경제적 이득을 얻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콘텐츠의 내용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기존의 미디어의 경우 콘텐츠에 하자가 있을 경우 그 미디어 운영자가 욕을 먹는다. 어떤 신문에 극우적인 내용의 기사가 실린다 했을 때, 책임은 그 기사를 쓴 기자가 아닌 그 신문사 자체가 진다. 그러나 오늘날의 소셜 미디어는 그렇지 않다. 소비자가 콘텐츠를 투고하고 업로드 하며, 그들 스스로 해당 미디어의 분위기를 만든다. 그리고 그 분위기에 대한 책임은 전부 업로더들과 유저들이 담당하고, 플랫폼의 운영자는 '표현의 자유'운운하며 슬쩍 책임에서 벗어난다. 그것은 페이스북이든 트위터든 니코동이든 일베든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지금 가도카와는 그 니코동의 콘텐츠를 이용해서 수익을 얻으려 하고, 그 콘텐츠가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선 전혀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것. 자기들이 콘텐츠를 직접 만드는 수고는 하지않고, 이용자들이 만든 콘텐츠를 편리하게 이용해먹으면서 윤리적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하는 것. 오쓰카는 경제적인 모델로는 훌륭할지 모르나, 이것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도완고나 가도카와는 그런 것에 대한 자각도 없다고 본다.

오쓰카에 따르면 1970년대 초두에 전공투세대는 정치적으로 패배하고, 관련자들은 그 세대들이 추구하던 이상세계와는 별개의 가상의 역사를 만드는데, 그게 1980년대에 창작자들 사이에서 유행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기동전사 건담>시리즈다. 한편의 작품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가상역사가 있고, 그 역사의 일부분이 콘텐츠화 된다는 감각이다. 이러한 경향은 <스타워즈>시리즈의 영향을 직접 받은 것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일반 문예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러한 가상역사를 실제 역사에 치환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그 결과가 바로 오움진리교가 일으킨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이다. 오움진리교 사건이 터졌을 때, 일본의 서브컬처 업계에서는 사실 한다리 건너면 다 오움진리교 사람이더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오쓰카에 따르면 그것은 사실이었다. 실제 서브컬처 업계에서 일하거나 관련된 인물들 중 상당수는 오움진리교의 간부였었고, 오움진리교 내부에도 홍보용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부서가 따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름붙인 것들이나 꿈꾸던 세계는 일본 서브컬처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낯설지 않은 그것이었다.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전사가 있고, 자기들이 바로 그 빛의 전사라는 걸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사린가스로 수많은 인명이 살해된 그 사건 이후로 가상의 역사를 진짜 역사로 치환하려는 시도는 없어지고, 대신 진짜 역사를 수정하는 역사수정주의로 일본 사회는 흘러간다. 역사교과서 왜곡이 격화되고, 지금 세상은 뭔가 잘못된 것이고 실제 진짜 우리의 역사가 있다는  감각이 이어지고 있으며, 이것이 일본의 넷우익, 자민당 등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닌 철저한 상업성을 추구한다. 이러한 세상을 만드는데 참여하고 겪어온 세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오쓰카 자기 자신의 세대이며 그렇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더욱 좌익적인 말과 행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라크 전쟁 파병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거나, 서브컬처 비평에서도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익이 되거나 상업적인 것만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게 되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조금 과격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비약이 아닌가하는 부분도 있다. <취향>-<세계>문화가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임과 마찬가지로, 가도카와와 도완고의 합병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도 일본 기업만의 문제로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일베라든지, 서브컬처와 직접 연관은 없지만, 심심하면 나오는 종말론적 신흥종교나 전쟁이 터진다 류의 사이비 예언 등 한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IS에 자진해서 들어가는 젊은이들은 또 무엇인가. 각각의 사회적 환경이 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현상이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건 이 사회 구조가 가진 공통의 문제가 있거나, 더 이상 한 사회만 살펴봐선 알 수 없는 연결성이 세계적으로 그리고 문화 경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리라. 

또한 전공투세대가 바라던 이상세계가 무너지자 대신 가상의 역사에서 위안을 얻으려했다가 그것마저도 무너지자 캐릭터의 데이터베이스로 세분화된, 동물적 소비를 한다는 아즈마 히로키의 주장과 사실 크게 다르지도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아즈마의 그것보단 오쓰카가 말하는 구체적인 상황이 더 실제적으로 다가오는 건 사실이다. 그것은 늘 업계 외부에서 자신의 이론으로 세상을 해석하려 한 아즈마와는 달리 업계 내부에서, 8,90년대의 그 모든 상황을 피부로 겪은 오쓰카가 가진 진정성있는 호소력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건 오쓰카가 이 이야기를 앞으로 '미디어믹스'를 연구하겠다는 대학원생들에게 했다는 것이다. 그가 바라는 건 서브컬처의 단순한 학문화, 돈이 잘벌리는 방법 등을 연구하는 게 아니다. 미디어믹스를 비롯한 팝컬처 현상 이면에 있는 정치성, 윤리성을 잊지 말고 연구 하라는 것이다. 이건 오쓰카가 한 말이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이지만, 연구는 언제나 실증적으로 발로 뛰면서 연구할 것, 허세에 차서 쉽게 일본은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말 것. 하지만 거대한 문제의식은 내면화하고 있을 것. 갈 길이 멀구만...



"'미디어믹스'연구는 일견, 극도로 비정치적이고 안전한 연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Web사회란 기업과 권력을 둘러싼 철저히 정치적인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만큼 연구지의 입장을 묻는 연구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와같은 미디어믹스에 의한 창조행위에 대해서 기업 또는 국가관리(TPP에 의해서 저작권 침해가 친고죄가 아니게 된 것만으로도 '2차창작'은 국가의 감시하에 들어갑니다)에 대해서, 창조자는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지, 또는 '봉사'해 가는지, 창작자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 추궁당한다는 사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86쪽)

"그러므로 '미디어믹스연구'는 이러한 문맥 속에서 해야 합니다. 하나의 '세계관' 속에서 다양한 상품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미디어믹스인 이상 시스템으로서는 동일하며, 거기에다 저작권이라는 근대적개인을 전제로한 권리를 가져오면서 복잡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취향>모델'로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가 생성되어온 역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려하지 않으니까 동인지라는 2차창작과 가도카와형 미디어믹스가 뭔가 새로운 현상인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코단샤가 코단으로부터 현대소설을 성립시켜 간 과정과 에도기의 가부키의 문제를 <세계>-<취향>의 관계성 속에서 연구한 사례는 의외로 잘 안보입니다. 이 시점에서의 연구와 구미의 사회학적인 미디어믹스 연구를 관련짓지 않는 한, 미디어믹스 연구는 역사적인 스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101-102쪽)



メディアミックス化する日本(미디어믹스화하는 일본)
大塚英志(오쓰카 에이지)
イースト・プレス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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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3 10:23

일본 학습만화에 나온 세종대왕과 이순신 이것 저것

저와 비슷한 연배라면(요즘 애들은 잘 모르니) 어릴 적에 집에 <세계의 역사>니 <한국의 역사>니 하는 전집 학습만화 한 둘 쯤은 집에 두고 읽었을 겁니다. 가만 보다보면 출판사와 작가는 다른데 그림 배치나 콘티, 진행이 거의 비슷한 경우도 있었는데, 막연하게 일본의 비슷한 만화들을 베끼거나 한데서 오지 않았을까하고 추측 하기도 했던...

그런데 며칠 전에 일본 서점에 우연히 들러서 우연히 어릴 적에 보던 학습만화와 비슷한 전집류를 발견하고 기쁘고 그리운 마음에 펼쳐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래 보시면 알겠지만 7권 그림이 어딘가 우리나라 장수그림 비슷해서 '어라?'하는 심정으로 꺼내보았더니


오오 제목부터가 '칭키즈 칸과 이순신'!! 왼편에 계신 분이 이순신인가 봅니다. 
근데 몽골제국시절과 이순신시절은 상당한 시간차가 날 텐데 이렇게 한데 묶였네요;
일본에서 출판되고 일본인 저자가 쓴 역사책인지라 이순신 장군은 일본인 입장에선 부정적으로 다뤄졌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론 어떤지 펼쳐보았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형적인 '한국식'표현으로 가득차서 좀 많이 놀랐습니다. '세계의 역사'를 다루는 거다 보니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 중심으로 그려진 건 당연하긴 한데, 자신들을 희화화까지 하다니요. 보다시피 거북선 출현하고요.

           일본인은 이순신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합니다. 젖렇게 칼에 찔려 피까지 흘리는 처절한 모습으로;;;                  반면에 이순신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침착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마지막 페이지입니다. 번역해보면
"이순신의 천재적인 작전과 행동력으로 일본수군을 괴멸시킨 조선왕조는 그 후 300년 이상 계속됩니다."
"다 이순신의 활약 덕분이지!"
근데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안나옵니다;

그리고 세종대왕도 한 코너(?)를 차지해서 한글 창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자를 백성들이 읽기 힘들어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전형적인 내용이지요. 오른쪽 위에서 뒤집어지는 사람이 세종대왕; <농사직설>을 지었는데 백성들이 글자를 못읽어서 못읽는다는 말을 듣고 뒤집어집니다; 80년대식 학습만화 개그;;;

전집 전체를 다 본 건 아니지만, '세계의 역사' 속에서 한국 인물이 나오는 건 이 정도 인 듯 합니다. 적어도 한국내에서 가장 위인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 대표적으로 나와 있는 셈이지요. 내용 자체는 특기할만한 건 없지만, 어릴 적 제가 읽었단 <세계의 역사>에선 일본이 2차세계대전 때 이외에는 거의 언급도 없었던 걸 생각하면(나와 있는 그것도 부정적으로 그려짐) 이렇게라도 나온다는 게 신기하며, 또 한편으로 그 표현방식이 너무 익숙한 방식이라 놀랍기까지 했네요. 일본은 철저히 조선사람들 입장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그려지고, 심지어 우스꽝스럽게까지 그려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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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0 15:45

글을 쓴다는 것. 생활 나눔

요즘은 거의 블로그를 운영안하다시피 한 것 같습니다. 과거 2, 3년간은 시험때문에 그렇다고 핑계를 대었지만, 지금은 딱히 그런 것도 아닌데 쓰지 않게 되네요. 블로그가 문제라기 보단 요즘은 글을 쓰는 감각이 매우 둔해졌다, 글을 잘 안쓰게 되었다 그런 느낌이 듭니다. 중2병이 억제(?)되고 있는 탓인지, 무언가를 인터넷에 보고한다든가, 어떤 생각이 들 때 사람들에게 그 생각을 공개해서 어떤 피드백을 받고 싶다, 이런 욕구가 많이 줄어든 느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무언가를 꾸준히 써야하지 않겠는가 하는 그런 부담감이 은연중에 드는군요.

처음 있는 일은 아닙니다. 제가 이 블로그에 공표할 수 있는, 어떤 열정을 태울만한 무언가가 있다면 다시 쓰게 될 것입니다.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 말하고 싶은 것들, 기록하고 싶은 것들. 이제부터라도 차분하게 써보려고 합니다. 

다시 블로그 하겠습니다. 뭐 그런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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