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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6 11:53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성장하지 않는 오타쿠와 성장한 오타쿠의 수용방식 애니 나눔

우네 츠네히로의 <젊은 독자를 위한 서브컬처론 강의록>을 읽다보니 든 잡상을 기록. 이번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의 스포일러 있을 수 있음. 쓰고나니 어그로성 글이 되어 버렸지만...

이번 <신극에바>가 공개되고 반응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잘 끝났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한편으로 특정 캐릭터들의 커플링이 마음에 안든다고, 온라인상에 폭언을 퍼붓고 있는 층도 있다. 전자라면 비오타쿠, 후자라면 오타쿠라는 식으로 장난삼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 진지하게 오바하면 전자는 인생의 여러 관문을 겪으며 성장한 사람, 후자는 아직 성장하지 못한 사람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이번 <에바>는 청소년기에 <에바>를 접해 여러 산전수전을 겪어 어른이 된 이에게 여러의미로 공감되는 부분이 많을 거라 본다.

오타쿠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사람마다 가지각색이다. 일반적으로 한가지 특징을 든다면 보통은 어린애들 용이라 생각되는 콘텐츠(만화, 애니, 특촬, 게임 등)를 성인이 되어서도 즐기는 층을 말하기도 한다. 몸은 성장해서 어른이 되었는데 정신은 어린시절, 청소년시절 그대로라 어딘가 미성숙한 어른같다. 우노 츠네히로 같은 경우는 이러한 오타쿠 문화의 특징을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에 빗대기도 한다. 즉 경제(몸)는 성장했는데 정신(사상, 내면)은 12세소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성장을 말하지만 실제론 어린아이 상태로 머물기를 바라는 일본 아이돌 문화와도 연결된다. 이를 소비하는 오타쿠들은 작품들을 반복해서 보며 현실에서 눈을 돌려 영원히 성장하지 않은 상태에 머물고자 한다. 여기서 성장이란 자신과 가족의 인생에 책임을 지는, 현실에 충실한(리얼충) 삶의로의 이행을 뜻한다. 

<에바:Q>를 보면 구작 <에바>에는 없었던 새로운 설정이 나온다. '성장하지 않는 육체'가 그것이다. 에바를 타는 파일럿들은 '에바의 저주', '에바의 주박'때문에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육체가 14세 소년, 소녀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다. '에바의 주박'을 메타적으로 해석하면 25년이 지나도록 <에바>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 주변을 서성거리는 팬들과 감독 자신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거라고도 볼 수 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산업적 요인 때문에 끝없이 같은 세계를 루프하는 일본의 장수 애니메이션들-<사자에상>, <도라에몽>, <짱구는 못말려>, <명탐정 코난> 등등-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낚시성 글로 <짱구> 마지막편 같은 게 인터넷에 도는 데 그런 작품들은 어김없이 성장한 짱구를 그리고 있다는 게 상징적이다. 즉 이 같은 작품들의 캐릭터들이 진짜로 성장해 버리면 작품 자체가 끝나는 거다.

<신극에바>를 보고 <에바>가 끝났다고 느끼는 감정이 드는 이유는 모든 캐릭터들이 내외적으로 "진짜로" 성장해서 '어른'이 되었다는 점에 있다. 주인공 신지는 구작 <에바>처럼 자기계발세미나 같은 독백을 하지 않는다. 주변의 조언을 듣고, 받아들이고, 절망 중에 일어나서 정면으로 현실을 마주한다. 구작 <에바>의 신지가 "어쩌다 보니" 세계의 신이 된 반면에, <신극에바>의 신지는 "확고한 자아를 갖고" "스스로" 세계의 신이 된다. 쿠로레이나, 아스카도 자신의 몸에 선재된 프로그래밍에 저항하는 선택을 하면서 뚜렷한 자아로 자신의 길을 간다. 겉으로만 어른이었던 미사토도 구작의 최후와 다른 방식으로 모두와 화해하고 마음의 결정을 다진 이후에 끝을 맞이한다. 아이다 켄스케는 중학생 때의 밀덕 모습이 싹 사라지고, 마을사람들을 위해 그 방대한 지식을 책임지고 활용한다. 토우지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듬직한 어른이 되어 가정을 꾸려나간다.

이러한 장면이 소위 성장하기를 거부하는 오타쿠들이 원하는 모습은 아니었을 거다. 그들은 여전히 멋진 에바들이 끊임없이 사도를 무찌르는 세상, 그 와중에 중학생 캐릭터들이 사랑싸움하는 그런 그림을 무의식중에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성장하기를 선택한 (구)오타쿠들은 주인공들의 어른스런 모습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인생을 투영하게 된다. 구작 에바를 보던 청소년들이 어느새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현실에 책임을 지게 되는 인생을 살고 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청소년기를 겪었던 캐릭터들이 나와 비슷하게 성장해서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 "아 잘 살고 있구나." "이제 놓아줄 수 있겠다."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난 이번 <신극에바>전 시리즈는  모든 캐릭터들의 성장담을 그리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창작자인 안노 자신의 변화와 성숙에 대한 답변인 것으로도 읽힌다. 그래서 어른이 된 그들과 이제 "작별"할 수 있다.

결국 신지도 어른이 되었다. 영원한 히키코모리 같았던 애가 직장도 다니고(아마?) 여친도 사귀면서 닭살 돋는 짓을 한다. 관객도 어른이 되었다. "아이고 우리 신지가 어느새 ㅎㅎ"라는 생각이 들면 본인도 성장한 것이다. 반면 "나의 에바는 이렇지 않아"를 외치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에바의 주박에 계속 빠져있고 싶은 사람들로 보인다.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대지만, 결국은 에바가 진짜 끝나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2021/03/22 23:54

NHK<프로페셔널-일의 유의(방식)> 안노 히데아키 스페셜을 보고... 애니 나눔


일단 결론부터 말하면 "안노같은 사람 밑에서 일하면 안되겠다 ㅋㅋ"

안노가 완벽주의라는 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근데 극장 개봉 1년 반밖에 안남았는데 지금까지 해온 모든 프로젝트를 다시 원점으로 되돌리는 패기란 ㅋㅋㅋ ㅠㅠ  온갖 걸 다 해다가 바쳐도 전부 마음에 안든다더니 결국 애초에 자기가 쓴 시나리오부터가 문제였던 것 같다고, 시나리오 작업부터 다시 한다고 선언하고 아무도 모르는 자기 방에 틀어박혔다는 거 ^ㅂ^ 스태프들이 이런 일은 처음이고 앞으로도 없을거라 허탈하게 웃으면서 해탈한 표정 짓는 게 포인트(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이번 <에바> 신극장판 시리즈에서 특이한 부분 - 콘티가 없다.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감독이나 연출자가 그림 콘티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작업에 들어가는 게 기본인데, 이번 에바 신극장판, 적어도 최근작은 이 콘티가 아예 없다. 그 이유는 그런 식으로 그려진 콘티는 어차피 감독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인 만큼 감독의 한계를 넘을 수 없어서라고 한다. 대신 각 캐릭터역을 대신할 실제 사람들에게 센서를 붙여서 3D영상으로 먼저 만든다. 이 때 실제 사람들을 앞에두고 이런 저런 각도로 찍어보고 자기 머리 속에 없던 독특한 구도를 만들어 보려고 한다. 3D영상 상태로도 온갖 앵글을 다 잡아본다. 그러다가 운좋게 걸리면 그 레이아웃을 채택하는 방식이다.

이건 예전 2004년인가 인터뷰(堀田 純司・GAINAX(2005)『ガイナックス・インタビューズ』 講談社)에서도 했던 말과 연관된다. 안노가 <에바 구극장판-엔드 오브 에바>를 만들고 나서 애니업계에 신물이 났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오늘 방영된 다큐멘터리에서는 TV시리즈가 끝나고 악플에 시달리다가 두번정도 진지하게 자살시도도 했다고 밝혔다. 이 당시 지브리의 스즈키 토시오의 조언을 좇아 <러브 앤 팝>이나 <식일>같은 실사영화를 만들어보는데, 2004년 인터뷰에 실사 촬영의 즐거움을 언급한 적이 있다. 실사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게 매력이라고... 즉 실사는 현장에서 이런저런 걸 시도해 보면서 더 좋은 걸 고를 수 있는 데 애니는 처음부터 모든 걸 결정한 상태에서 진행하니 재미없다는 것이었다. 아마 실사 특유의 운으로 얻어걸리는 그 감각을 이번 신극장판 에바에서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안노가 앵글에 집착하는 것도 유명한데, 이번 다큐멘터리에서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했다. "일단 앵글이 좋으면 움직임이 전혀 없어도 어색하지 않고, 영화가 있어 보인다"고. <에바>에서도 그런 연출이야 수도 없이 많았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고, 실사 영화들에서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특이한 앵글에 집착했었다.

그 이외에도 액션 장면들 초단위로 재미없다고 지적질하고... 성우들에게도 굉장히 매우 미묘한 단위로 지시한던데 뭐 어쩌라는 건지 잘 모르겠다^^;;

이런 완벽주의자 안노 덕에 결국 사상 최장인 4년이라는 취재기간을 기록한 다큐 제작자 측의 빡침도 전해지는 방송이었다. 자기가 방송사 연출자도 아니면서 자꾸 이거 찍어라 저거 찍어라 이건 찍어도 별수 없으니 찍지말라, 이렇게 찍으면 재미없을 것 같은데, 뭐라뭐라 참견하고 ㅋㅋ. 심지어 제작진들 따로 불러서 훈계질까지 했다. 니가 그냥 방송 만들어라 ㅋ

그리고 제일 중요한 이 다큐 시리즈의 하이라이트! "당신이 생각하는 프로페셔널이란?"이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게 항상 라스트를 장식한다. 근데 안노는 이 질문에 "별로 상관없지 않느냐, 프로페셔널이라는 말은. 이 방송 다 좋은데 그 단어는 싫다. 다른 타이틀로 하는 게 더 좋지 않겠나."로 대답하고 도망가는 게 오늘 방송 최고 개그였다 ㅋㅋㅋ

덧1
안노의 이런 성향을 봐서라도 이후 새로운 에바는 (적어도 안노 손에서는) 안나올 것 같다. 에바 한 번 더 만들다가 다 죽을 것 같다.

덧2
"사요나라~ 스베떼노 에반게리온(안녕~ 모든 에반게리온)"이라는 이번 극장판의 유명대사는 녹음할 때 거의 즉석에서 정해진 것으로 밝혀졌다. 안노가 직접 손글씨로 그 대사를 쓰고 성우 오가타 메구미 씨가 연기하고 한큐에 통과 ㅎㅎ 그걸 보면서 안노 왈 "이걸로 25년치 다 담아서 날려버린다!"

2021/03/09 21:03

[약스포]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다카포 감상 애니 나눔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의 마지막을 봤다. 음... 역시 다 이해가 되는 건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나긴 한 것 같다. 더 정확히는 안노가 끝내고 싶어한 것 같다. 그렇다고 구극장판처럼 폭주한 건 아니고... 안노 자신이 싫어했던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주려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성숙해졌다면 성숙해졌고... 암튼 끝나긴 했다는 느낌.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아마 이게 마지막 에바가 될 것이다.





이하엔 스포일러가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알고 싶지 않으면 읽지 마세요.






일단 이번 신에바를 한단어로 정리하면 "어른"이다. 이 어른이 되었다는 건 캐릭터들에게도 적용되고 원작자인 안노에게도 적용된다. 실제로 이 마지막 작품에서 주요 캐릭터들이 어른이 된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주제(메시지) 자체는 새롭지 않다. 아니 정말 놀라울 정도로 구에바의 주제를 따라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의 벽을 허물기 위해선 용기를 내서, 상처를 무릅쓰고 주체적으로 다가가야 한다'가 주제다. 이번엔 한층 더 노골적이다. 이 작품이 어디까지나 애니메이션(픽션)에 지나지 않는다는 메타적인 암시도 구작 극장판으로부터 이어진다. 이번엔 아예 특촬물 세트같은 연출도 나오고, 마지막에 실사로 이어지는 구성까지 구극장판과 유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점이 있다. 구작(극장판)이 안노의 우울감과 분노가 극대화되어 있을 시기 "아 시발 다 모르겠어, 다 박살낼꺼야!!!"며 작품과 캐릭터를 모두 파괴했다면, 이번 신극장판의 마무리는 순한 맛이랄까. 적어도 작품 속 주요 캐릭터 어느 누구도 어떤 종류의 후회나 아쉬움을 남기지 않는다. 구작과 신작 모두 죽는 캐릭터도 훨씬 의미있게 죽는다. 심지어 겐도마저도 자기의 진심을 털어놓을 정도니...

어쨌든 신지는 행복해진다. 신지가 행복하면 사실 에바는 정말 끝난거다. 그 외에도 모든 캐릭터들의 끝을 확실하게 해줬고, 모든 루프와 평행세계까지 들춰내서 결말을 지어버렸다. 커플링까지 모두...

아마 누구나 느낄 것이다. 작정하고 끝을 내는구나라고...  끝을 내고 행복해하는 안노 감독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지난 10년넘게 이어진 신극장판 시리즈는 구판의 보완을 위한 거였다. "신세기에반게리온 보완계획"이랄까? 어쩌면 "어른답지 못하게" 폭주해 버린 구극장판에 대한 속죄인 것 같기도 하다. 다시 캐릭터를 구축하고 다시 이야기를 만들어서 이번에는 좀 더 성실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Q에서 좀 삐끗하긴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 상황 속에서 최대한 힘내서 마무리를 지었다. "정말 장하다 안노"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에바는 사실 안노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기도 하다. 이번 극장판에서 신지가 힘을 얻는 과정은 안노가 Q이후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을 때, 거기서 빠져나왔던 과정과도 일치한다. 

하지만 그래서 싫어하는 이들도 많은 것 같다. 어찌되었든 팬들이 원하는 결말과는 달라져 버린 면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특히 캐릭터에 과몰입하던 이들은 엄청 욕하고 있더라. 사실 그 덕후들이 열받는 포인트는 상상의 나래라도 펼치게 '커플링에 있어서는' 어느정도 열려 있어야 할텐데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완전히 결론이 확실하게 나버린거다. 공식적으로 가능성을 차단시켜버리고, 말 그대로 '결론을 내버렸다'. 그게 가장 기분 나빠하는 포인트인 듯 하다. 그런 사람도 있는 거겠지만...

에바는 내가 지금 일본에 살게 한 계기가 된 작품이다. 벌써 24년전인가. 어쨌든 길고도 긴 작품의 여정이 이제 끝이 났다. 

사요나라 스베떼노 에반게리온!


2021/01/17 20:59

케이팝과 제이팝의 오리지널리티? 생각 나눔

오리지널리티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어떤 표준적인 것이 존재하고, 거기에 대해서 자신의 걸 어떻게 위치지울 수 있느냐에 따라서 드러나는 것이다. 간혹가다 전에없던 새로운 것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건 정말 예외적인 아주 드문 현상일 뿐이다. 그것 역시 보편적인 표준과 비교해서 드러난다는 점에는 다르지 않다. 근데 그 표준을 애써 무시하고 자기식을 고집한다고 그게 오리지널리티로 인정받고 곧바로 우수함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이유는 간혹 J-pop을 쉴드친답시고 'K-pop은 영미권을 흉내냈을 뿐이지만 J-pop은 일본만의 독특함이 있다'는 논리를 들이미는 이들이 봐서다. 그 말대로 K-pop은 많은 부분 영미권의 주류 음악과 비슷하다. 그렇다고 똑같은 건 아니다. 마냥 똑같기만 해서는 이렇게 뜨질 않는다. 비슷하지만 뭔가 다르니까 뜬거지. 이런 걸 두고 K-pop의 하이브리드 성이라고 부르는 논자도 있더라.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 K-pop은 영미권의 주류음악을 흉내낸 것이 아니라 그냥 표준적이고 가장 보편적인 팝 음악의 수준에 맞춘거다. 서태지가 20년전에 그알과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기자가 '왜 외국음악을 따라하냐'고 묻는다. 서태지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대중음악이 발달한 곳은 미국이고 그 미국의 주류 음악을 한국에 사는 사람들도 많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요지로 답을 하더라. 실제로 2000년대 초반까지 서태지 음악은 미국의 주류 음악을 소개한 면이 있다. 어쩌면 선민의식 처럼 보여서 좀 아니꼬울 수도 있는데, 우물한 개구리 같은 한국 대중 음악계에 질 좋은 선진 문물을 들여왔다는 점에서 분명 의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서태지만의 개성이 없었던 것도 아니라, <발해를 꿈꾸며>나 <교실이데아>, <컴백홈>, <시대유감> 등은 철저하게 한국적인 환경과 영미권 음악의 하이브리드 속에서 탄생한 음악이다.

이후 발전하기 시작한 한국의 아이돌 그룹 문화도 이와같은 세계 표준을 의식하는 가운데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본인들이 의도하든 아니든 단순한 카피만은 아니었다. 개성은 어떻게든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아니라면 그냥저냥 소비되고 도태될 뿐.

일본 역시 처음엔 해외를 의식하면서 J-pop이 커왔겠지만, 90년대 들어서 세계주류음악이 힙합같이 리듬위주의 음악으로 변해갔던 것과 다르게 락을 중심으로 멜로디컬한 음악이 주류가 되었다. 그게 심화되면서 일본만의 자기완결적인 갈라파고스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렇게만 해도 충분히 돈이 벌리니까. 물론 그것 역시 일본만의 개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라 그 자체를 나쁘다거나 열등하다고 말할 것은 아니다. 그래, 세계주류 음악과 J-pop이 많이 다른 건 사실이니 굉장히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건 알겠다.

문제는 "세계를 노린다"고 했을 때, 자신들이 세계의 주류적 감성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를 인식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방탄소년단이 부러우면 적어도 그 세계표준 수준에 도달을 하고 그 속에서 자신들의 개성을 발휘하도록 궁리를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냥 '일본은 일본의 길을 가겠다'는 반응은 발전의 여지를 스스로 없애고 마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오리지널리티인 건 맞지만 그냥 우물 속에서의 오리지널리티일 뿐인거고, 그걸 좋아하는 외국인들도 분명히 있겠지만, 절대 보편적인 것이 될 순 없다. 

뭐랄까, 세계표준적인 스타일과 수준(레벨)을 무시한 채 자신들의 개성으로 밀어붙이겠다는 발상은 다르게 말하면 이런 거 아닐까? 

그림쟁이: 뎃셍을 못하는 게 저의 개성입니다.
소설가: 저의 오리지널리티를 살리기 위해 다른 작품은 하나도 읽지 않습니다.
연구자: 제 연구의 독특함을 위해 선행연구와 아무런 관련이 없도록했습니다.

2020/10/26 14:28

애니 <귀멸의 칼날> 극장판의 성공 배경엔 코로나가 있다? 애니 나눔

*저는 일본에 거주 중입니다.

귀멸이라는 현상

요즘 <귀멸의 칼날> 극장판이 대세다. 길거리만 돌아다녀도 그걸 느낄 정도다. 흥행 첫날부터 대박 조짐이 보이더니 그 <겨울왕국>이나 <너의 이름은> 같은 작품들의 흥행수익도 다 뛰어넘을 기세다. 이 코로나 시국에 이상할 리만 한 극장용 영화의 히트에 <귀멸> 자체의 매력에 관련된 분석들이 눈에 띈다. 물론 그런 작품 자체의 힘을 무시할 순 없겠지만 개인적으로 코로나 때문에 더욱 히트했으리라 짐작한다.


넷플릭스 등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와 귀멸 현상의 상관관계

먼저 <귀멸의 칼날>이라는 작품 자체를 보자. 이 작품은 그 유명한 만화잡지 주간 <소년점프>에서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총 23권으로 연재를 끝낸 작품이다(단행본 23권은 아직 미발매). TV 애니메이션은 2019년에 총 26화로 방영되었고, 원작의 부족한 부분까지 보완한 완벽한 완성도로 크게 인기를 끌었다. 주제가를 부른 LISA가 연말 홍백가합전에 이 곡으로 참가할 정도였다.

대단한 인기이기는 했다. 하지만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애니 정도였지 이렇게까지 큰 붐이 날 정도는 아니었다. 애니를 잘 모르는 나 같은 일반인에겐 그냥 그런 애니가 있구나 정도로 넘어갈 수준이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집에서 틀어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따금 장 보러 가는 슈퍼에는 별 관련 없어 보이는 껌에까지 귀멸 캐릭터가 붙어 있었고, (<귀멸>을 보고 난 이후에 발견한 거긴 하지만) 애니메이션과 일절 상관없어 보이는 '유니클로' 택배 박스에 까지 <귀멸>의 그림이 박혀있었다.

이 정도쯤 되니 이게 뭔데 이러나 싶었는데, 때마침 가입한 넷플릭스에 <귀멸의 칼날>이 보였다.

최근 일본 넷플릭스를 이야기할 때면 다들 <사랑의 불시착>이나 <이태원 클라쓰> 같은 한류드라마 이야기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베스트 10중에 절반 이상의 작품이 한류드라마니까. 한류에 주목하는 건 일본 미디어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간과 말아야 할 건 그 한류드라마 이외의 나머지 작품은 전부 일본 애니라는 점이다. <귀멸>은 적어도 6개월 이상 그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귀멸 캐릭터를 보다가 어떤 작품인가 싶어 한 번쯤은 클릭하게 된다.

더욱이 <귀멸>은 넷플릭스에서만 서비스되는 작품이 아니다. 아마존 프라임이나 훌루 등, 일본에서 정액제 동영상 서비스를 신청하는 이라면 누구나 <귀멸>을 볼 수 있다. <슬램덩크>같이 옛날 작품이 아닌 이상 이렇게 많은 플랫폼에서 동시에 서비스되는 작품은 그렇게 많지 않은 거로 알고 있다. 코로나와 더불어 이러한 공격적인 서비스는 작품에 대한 접근성을 크게 높였다.


그리고 <귀멸>의 작품 자체도 꽤 넓은 타깃을 포함할 수 있다. 솔직히 처음 몇 화는 다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설정 때문에 그냥 전형적인 점프게 애니 정도로 보이긴 했다. 심지어 요즘 세상에 '성장형 주인공'이라니... 전형적인 걸 넘어 고전적이기까지 하다. 근데 또 전형적인 라는 건 오히려 시청자에게 안도감을 주기도 하는 법이다. 묘한 감상이기는 하나 최근 작품인데도 옛날 작품을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심지어 주연 성우는 젊은 사람들이지만, 단역 오니 역으로 나오는 몇몇 성우는 본좌급 성우(90년대에 주로 활동하던)가 섞여 있어 묘하게 향수를 자극했다. 또한 소재 면에서도 장난감 판매 광고 같은 아동용 작품이 아니면서도, 모에나 BL 같은 섹슈얼리티가 강조되는 소위 오타쿠 작품 또한 아니었다. 이러한 요소가 연령상으로 상당히 넓은 층을 커버하는 데 크게 일조하지 않았는가 한다. 작화나 연출 등, 작품 자체의 완성도야 더 말할 필요도 없고.


귀멸 극장판의 전략

그렇게 26화를 정신없이 보고 나니 두둥! 끝이 났는데 끝이 아니었다. 주인공들은 새로운 사건을 좇아 열차를 탄다. 그리고 그 열차에서 일어나는 일이 이번에 개봉한 극장용이었다.

통상 TV 시리즈의 인기에 힘입어 극장용 작품이 나올 때는 별개의 에피소드를 창작해서 스페셜 판이나 스핀오프 같은 형태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대신 1기에서 끝난 이야기는 2기 시리즈에서 이어가고. 근데 <귀멸>은 극장용에 메인 스토리를 넣었다. TV 판 마지막 장면과 바로 이어지도록 말이다. 그러면서도 무한열차라는 독립적인 사건을 다루는 영리함을 보여, 스페셜 판 같으면서도 스페셜은 아닌 영화를 만들어냈다. 심지어 후지TV 계열 방송국에서는 TV 시리즈를 두 편으로 나눈 편집본(그냥 매화 반복되는 오프닝 엔딩 정도만 잘라내고 연속으로 틀었음)을 개봉 직전에 몰아서 방송한다. 마치 이거 보고 영화 보면 더 재미있을 거라는 듯이. (<에반게리온 신극장판>도 비슷하게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비롯해 여러 동영상 서비스를 통해 기간 한정 등으로 기존 극장판을 계속해서 내보내고 있음).

정작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는 아직 극장판을 못 봤는데, 사전 정보 없이도 무난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TV 판을 보고 싶으면 보라는 듯이 온갖 곳에 <귀멸>을 볼 수 있는 루트를 열어놓았다.


멀티플렉스를 지배한 귀멸

<귀멸> 개봉과 관련해 한 가지 특이한 경험이 있다. 내게 한국어를 배우는 한 일본인 학생분이 지난주에 보고 싶은 영화가 있어서 극장에 갔는데, <귀멸>밖에 안보여서 결국 보고 싶은 영화를 못 봤다는 이야기였다. 이 말에 난 많이 놀랐다. 한국에서라면 흔한 경험이다. 멀티플렉스영화관이 대세 영화에 편승해서 사실상 특정작품을 독점시켜버리는 이야기는 명절 때마다 나오는 불평에 다름아니다. 근데 일본은 그런 일이 잘 없다. 한국은 특정 대세 작품을 중심으로 단기간에 뽕을 뽑고, 다음 작품에 넘어가는 구조라면, 일본 멀티플렉스는 대세 작품이 있어도 많은 스크린을 차지하게 하진 않는다. 대신 오~래 상영한다. 한 작품이 6개월 이상 가기도 한다. 이건 영화를 대하는 양국의 소비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귀멸>은 그 공식을 깼다. 예를 들어 나고야역의 대표적인 멀티플렉스인 미들랜드 시네마의 1관과 2관 모두 <귀멸>이 상영되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지금까지 거의 없었고, 있다고 해도 <겨울왕국> 같은 작품 정도가 1관에선 더빙, 2관에선 자막 같은 형태로 걸려있는 정도였다. <귀멸>은 아예 같은 작품이 스크린 두 개 이상을 차지하는 기현상이 일어난 거다.


이건 뭐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코로나 때문이다. 예로든 미들랜드 시네마도 한 달 넘게 극장을 쉬었고, 운영해도 예전보다 절반 정도밖에 관객을 받을 수 없었다. 개봉 예정 영화도 다 미뤄지는 판에... <귀멸>이라는 구세주가 나타난 거다. 딱히 경쟁상대도 없겠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귀멸>에 몰아주기 한판. 물 들어올 때 노 젓지 않으면 극장 망하게 생겼다. 이례적인 화제가 되면서 더욱 관객이 몰려들고 있는 것 같다.


귀멸 이후는?

요는 코로나 시국에 의한 넷플릭스 등의 동영상 서비스의 흥행, 그리고 이를 노린 공격적인 마케팅, 적절한 개봉 타이밍과 극장의 사정이 겹쳐 이례적인 흥행이 일어나지 않았나 싶다. 작품 자체도 좀 잔인한 걸 제외하면 누구나 안심하고 볼 수 있는 취향 덜 타는 왕도형 작품이고...

90년대 중반에 심야에 재방송되면서 폭발적인 붐을 일으킨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겹쳐 보이는 부분도 있다. <에바>의 히트가 심야시간대 TV 애니와 제작위원회방식이라는 새로운 길을 열었으니까 말이다. <귀멸>도 넷플릭스 등의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와 연관되어 일본 애니 산업의 새로운 길을 터 줄지 어떨지...  앞으로가 기대되는 상황...

암튼 <귀멸>의 흥행을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 차원에서 적어보았다. 이번 주엔 함 보긴 해야할텐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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